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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통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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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날 귀갓길-. 피곤한 몸으로 집을 향해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순간 나는 주춤 발길을 멈추었다.
희미한 형체의 그림자가 전방 약 5미터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저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 뿐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다음날 귀갓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떤 착각이나 환상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불길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동네로 하숙을 정한지 약 1년이 되었다. 그동안 안정된 마음으로 오직 연구에만 몰두해 왔다.
그런데 어제 오늘 이상한 느낌이 드는 어떤 그림자가 나를 자극했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감시하며, 추적하고 숨어버리는 수고를 하는 것일까?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기억!- 혹시 그 여자?


나는 그 다음 날 출근 즉시 흰색 쥐(실험동물)에서 혈액을 채취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어른 손가락 크기만 한 쥐에서 혈액을 채혈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험대 위에 백여 마리의 쥐들이 상자 속에서 우글거렸다. 옆에는 소독된 가위, 핀셋, 비커 등이 놓여 있었고, 실험실 바닥에는 크레졸 용액(소독수)을 가득채운 양동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쥐의 꼬리와 등을 동시에 잡았다. 이렇게 해야 쥐는 버둥거리지를 못한다.
그리고는 입구가 넓은 비커위에 쥐의 머리를 거꾸로 향하고 예리한 수술가위로 목을 싹둑 잘라 똑똑 떨어지는 피를 비커에 받는다.
두 마리 세 마리 계속 쥐의 목은 잘려 나간다. 순식간에 목 잘린 쥐들은 양동이 속에 버려져 꼬물거리며 이 세상과 등을 지게 된다.
실험용 쥐들은 지구상에 인간 행복과 평화를 위해 처절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손가락 크기만 한 작은 쥐는 핏줄도 미세하고 피의 양도 적어 주사기로는 채혈이 불가능하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쥐의 목을 자르는 잔인하고 끔직스런 일은 계속되어진다.
소독수와 목이 잘린 쥐들의 피가 섞인 비릿한 냄새가 역겨웠다.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쥐들은 몇 마리 남지 않았다.
대신 대형 비커에는 시뻘건 피가 제법 그득해졌다. 채혈한 쥐의 피는 토끼에 주사하여 쥐 피에 대한 면역항체를 얻기 위한 실험이었다.
실험을 마친 후 손을 소독수에 깨끗이 씻고 주변 청소까지 모두 끝냈다.
일을 끝낸 주말인지라 나는 모처럼 일찍 퇴근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 같은 뿌듯한 기분으로 하숙집에 귀가했다.
귀가 즉시 주인아줌마는 웬 메모 쪽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메모 쪽지를 받았다.
“최성진 씨! 이야기는 만나서 해요. 전화 주세요. ○○○- ○○○○, 수정 드림”
나는 당황할 것도 놀라 것도 없었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즉시 전화번호 다이얼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그런데 여자의 음성은 떨렸다. 아마도 전화를 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작가의 말


언제부터인가 나는 편지철 하나를 입수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혹 편지철을 들추며 가슴 설렘을 느끼곤 했다.
편지는 그 어느 문학 장르보다도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비록 손때 묻고 빛바랜 오래된 편지글이지만 분명 생동감과 생명력이 짙게 묻어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편지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냥 두었다가는 편지철이 언제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어느 서랍 속에 처박혀 있을지, 계속 잘 보관한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분실될지, 밝은 빛도 못보고 그냥 스러지고 말 것인지 예측 불허다.
더 중요한 것은 픽션 또는 논픽션을 떠나서 개인의 사생활을 들추어 보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아 송구스럽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날이 갈수록 각박하고 메마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좀 더 윤택한 감성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서랍 속에서 편지철을 꺼냈다. 그리고는 감히 이 편지들을 소설의 화두로 정하여 글쓰기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분량의 편지글을 알리고 싶었고,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맑은 영혼을 심어주고 싶었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진부한 내용의 편지라고 아예 덮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이 편지글에는 아득한 추억 속에 순수함, 열정, 은근과 끈기를 잔잔한 감동으로 가슴을 울린다. 젊은 날 어느 한 여인의 사고와 감성, 그리고 열정을 느끼게 한다.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편지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소설을 만드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시행착오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 쓰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편지글을 주제로 소설작품의 얼개의 윤곽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설 형식에 너무 구애받지 않고 편지글을 몽땅 공개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름다운 첫사랑 추억의 편지글과는 상치되는 살인사건을 과감하게 끼워 넣고 조화로운 소설 작품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나의 글쓰기 전쟁은 시작되었다.
신문사 유명 여기자인 유희진이 호텔 5층에서 추락하여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흥미위주의 죽음이 아닌 아름다운 사랑과 삶의 행복을 갈망하는 나약한 현대인들의 사랑의 파편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죽음을 당한 유희진 기자의 가방에서 빛바랜 낯선 편지철이 발견된다. 이 의문의 편지글을 통해 소설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편지의 수신인인 젊고 유능한 대학교수 최성진을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택했다. 그의 연구생활, 그의 과거사, 그의 일상사, 그의 일처리에 대한 정서와 자세가 자연스럽게 소설 전체에서 드러난다.
최성진의 성품, 그의 학문과 성공으로 향하는 의지, 그의 이성관에 대한 부조화와 혼란, 이성과 감성사이에서 방황하며 갈등하는 그의 인간성의 모순 등이 마침내는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이 소설을 진행시키면서 나는 편지글을 사랑했고, 편지의 발신인인 강수정의 행운을 빌었고, 비명에 간 유희진의 불행에 울었다. 특히 냉소적이며 이기적인 최성진의 파멸에 대한 동정과 안쓰러움이 연민의 정으로 바뀌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소설을 이끌어간 미모의 여형사인 류채령의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과학수사 원칙을 준수하며 이 소설 전체를 두루 두루 섭렵한 유일한 인물인 류형사를 존경한다. 수사를 진행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사랑, 미움, 갈등, 그리고 인간의 간교함, 사악함을 경험하며 번민과 고뇌를 거듭하며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류형사의 수사과정에서 겪는 온갖 희로애락, 그리고 갈등과 모순 등을 나는 함께 호흡하며 공감했다. 그녀 특유의 과학수사 원칙과 객관성으로 일관된 수사태도에 정의가 승리하는 쾌감을 느끼며, 새로운 과학지식을 폭넓게 경험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지극히 평범한 소설로 시도했다. 실제 이야기인지 창작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소설로 만들고 싶었다.
실제 현실과 너무 동 떨어진 이야기를 나는 싫어한다.
이 소설은 나의 최초의 이야기 작업이었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고, 또 절대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또 한 번의 고백을 하려한다. 이번 작품은 1999년 한국추리작가협회 “제15회 추리문학신예상”을 수상한 나의 장편소설 <슬픈 만남>을 개작한 소설이다. 더 많은 편지글을 넣으면서 구성의 변화, 문장표현의 손질 등 한편의 또 다른 느낌의 장편추리소설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 작품과 달라진 것은 편지를 주고받은 남녀 간의 만남에 관한 상황설정과 많은 분량의 편지글을 소설 전반부에 도입한 것과, 중반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며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수사가 진행되는 설정으로 소설을 재탄생시켰다.
무엇보다도 편지글이 활자화되어 한권의 소설 속에 공개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너무 많은 분량의 편지글로 자칫 소설이 미미한 편지글 소개로 그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독자들의 공정한 평가에 맡긴다.
어떤 느낌으로 전해질 것인지 냉철한 심판과 조언을 기다린다.


* 이 책이 나오기까지 편집과 인쇄를 맡아주신 한림원 김흥중 사장님과 편집부 김미성 님, 디자인실 정아름 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8월 한 여름, 폭염과 폭우 속에서

최 상 규